광명천지,홍익인간
개항(1842~1873)
1842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전했습니다. 세도가는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영길리 동인도회사와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영길리는 조선에게 개항을 요구했고,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서양의 어러 국가들과 무역을 하여 이득을 얻었지만, 백성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황해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는 세도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1847년 헌종은 사화를 일으켜 세도가를 숙청했습니다. 조선은 개화를 시작하였고, 이는 일본보다 빨랐습니다.
고종 태황제(1873~1918)
헌종의 양자 고종 태황제가 즉위했습니다. 고종 태황제는 개화파를 적극 등용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갑신개혁, 갑오개혁으로 이어지는 개혁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 국가로 발전시켰습니다. 1875년 일본의 운요호를 완전히 박살내었으며, 일본과의 외교에서도 우위를 점했습니다. 1881년, 고종 태황제는 두번의 아편전쟁과 서태후의 폭정으로 몰락한 청나라를 침공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남만주와 일본을 합병한 조선은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었습니다. 1897년에는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습니다. 새 연호인 광무를 선포한 고종 태황제는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적 군제 개편과 산업 육성을 통한 경제 성장을 이륙했습니다. 대한제국은 최고의 호황기를 누렸습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한제국은 협상국의 적인 동맹국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밀리기 시작한 대한제국군은 패전 위기에 처했고, 고종 태황제는 자신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비변사를 이용한 독재를 시작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은 점점 부패해져갔고, 전쟁에서도 패전하며 한반도와 일본을 제외한 모든 식민지를 잃었습니다. 관료들은 고종 태황제에게 등을 돌렸고, 고종 태황제는 자신의 아들인 순종 장황제에게 양위 후 쓸쓸히 붕어했습니다.
순종 효황제(1918~1946)
고종 태황제의 양위 후 몰락한 황권은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읺았고, 비변사 독재는 계속되어 전제군주정의 무능함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또한 1929년 미리견에서 대공황이 벌어져 대한제국의 경제는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참다 못한 인민들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시위를 일으켰고, 순종 효황제는 이를 수용하여 첫 총선을 통해 1대 내각이 출범하였고, 대한제국은 잠시 경제 성장을 이륙하였습니다. 1936년, 일본통감부에 은밀히 활동하던 군 세력들은 일본의 영광을 이룩하고자 대한제국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 위기로 대한제국은 일본 열도를 잠시 잃었지만1940년, 동맹을 체결했던 미국의 지원으로 대한제국은 이길 수 있었습니다.
연종 익황제(1946~1966)
하지만 피폐해진 국토와 30만명의 전사자는 일본을 식민지배하는 것을 포기하게 했습니다. 연종 익황제는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1949년 출범한 박무덕 내각은 연종 익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미리견에 경제 협정 체결을 요구했습니다. 미리견은 지나 전선이 어떻게 될 지 모르기에 반공의 최전선인 대한제국에게 유리한 경제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일본은 대통령제 국가로 독립했지만 경제적 종속국이 됐고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연종익황제 시기 문화와 경제 발전은 급속도로 빨라졌습니다. 이후 연종익황제는 대한제국을 UN의 원초회원국으로 만들고 경제 10위권 국가로 만든 뒤 붕어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연종은 북간도의 영유권을 재회복시켜 복속시켰습니다.
광종 광황제(1964~1966)
부흥의 시대에 즉위한 연종 익황제의 장남 경흥대황제는 의회개혁,새 국제 제정,정부부처 개편을 통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즉위한 지 겨우 2년만에 간도와 규슈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덕용대황제(1966~)
경흥대황제가 아들 없이 죽자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53세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개혁을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대황제 폐하의 치세 아래 우리는 더 번영 할 것입니다.